지구의 소녀 히토미가 가이아로 소환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히토미는 부상으로 육상을 그만두게 되고 자신이 사는 이유를 잃어버린 채 무기력하게 방황하고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상처를 주고 그 죄책감에 빠져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때 히토미의 생각과 공명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환상을 보게 되고 하늘에 지구가 떠있는 이 세계인 '가이아'로 소환된다. 히토미는 고대의 거인 병기인 '에스카플로네' 안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사라져 버린 왕국 파넬리아의 왕자이면서 용족의 후예인 반과 만나게 된다. 반은 파넬리아를 멸망시킨 형 폴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반란군인 '아하라키'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아하라키의 반란군과 반은 히토미를 '날개의 신'이라고 부르며, 그녀가 에스카플로네를 각성시켜서 가이아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가이아는 이미 오랜 예언에 따라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현재 가이아를 파괴의 길로 이끌고 있는 인물은 반의 형이자, 흑룡족의 우두머리인 '폴켄'이었다. 동생인 반에게서 왕의 증표가 나타나자 폴켄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파넬리아를 멸망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가이아 전체를 멸망시키고자 했다. 에스카플로네를 깨워 가이아를 멸망시킬 '날개의 신'으로써 히토미를 가이아로 불러들인 인물도 폴켄이었다. 히토미가 자신이 아닌 동생 반의 곁으로 소환되자, 폴켄은 히토미를 빼앗기 위해 아하라키에 총공격을 가한다. 히토미를 지키려다 반은 큰 상처를 입게 된다. '반'의 상처를 히토미가 돌보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폴켄이 도시를 공격하고 에스카플로네는 히토미의 목걸이에서 다시 소환된다. 에스카플로네에 탑승한 반은 흑룡족의 용격대 대장 디란두와 전투를 벌인다. 점점 더 에스카플로네에 동화되어가는 '반'은 이성을 잃어가고, 에스카플로네 역시 예언대로 가이아를 멸망시킬 듯 도시를 모조리 불태운다. 죄 없는 사람들이 다치고, 건물이 파괴되는 모습을 본 히토미는 에스카플로네의 앞을 막아서고 히토미의 의지로 인해 에스카플로네 역시 파괴적인 행동을 멈춘다. 날개가 달린 용의 모습으로 외형을 변화시킨 에스카플로네는 반, 히토미와 함께 폴켄이 있는 공중 요새로 향한다. 폴켄은 슬픔이 가득한 세계를 함께 멸망시키자고 설득하지만 히토미는 이를 거절한다. 결국 폴켄은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던 수인에 의해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히토미는 평화가 찾아온 가이아를 뒤로하고 다시 지구로 돌아간다.
<에스카플로네>에서의 '날개'의 의미
히토미는 친구에게 상처를 준 자신의 '소멸'을, '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형 폴켄에게 복수를, 폴켄은 세계의 멸망을 바라고 있다. 소멸과 복수, 멸망을 바란다는 것은 자신의 현실을 똑바로 보지 않고, 그 상황에서 도망치려는 책임감 없는 행동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날개'란,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자신을 버리는 용기를 뜻한다. 폴켄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날개'를 버린 성장하지 못한 상태로 남았다. 그러나 히토미와 반은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성숙한 상태, 다시 말해서 '날개'를 가지게 되었다. 용으로 변한 에스카플로네에 날개가 생겨난 것, 지구로 돌아가는 히토미의 등에 돋아난 날개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TV 편과 극장판은 같은 콘셉트의 다른 작품이다
<에스카플로네>는 TV 방영 편과 극장판의 두 가지 버전이 있다. TV 방영 편은 총 26화로 그만큼 길고 많은 에피소드를 2시간도 되지 않는 극장판에 모두 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지구에서 살던 소녀 히토미가 '가이아'에 소환되어 펼쳐지는 이야기로 콘셉트에서의 큰 틀은 비슷하다. 하지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악역 디란두, 알렌 세자르, 밀레나 공주 등 TV 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캐릭터들이 극장판에서는 큰 존재감 없이 엑스트라에 그쳤다. 인물 사이의 연관성도 떨어진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TV편의 마니아들은 극장판에 굉장히 많은 실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두 작품이 가지는 세계관과 중심 스토리는 같은 양상을 띠고 있지만 극장판은 TV편의 후속 편이 아니다. 두 작품은 별개의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고, 등장인물들을 제외하면 다른 분위기를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TV편 에피소드를 보지 않아도 극장판을 보는 것에 큰 무리가 없다. 두 작품을 따로 떨어뜨려 감상한다면 극장판이 실망할 정도로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극장판의 더 세련된 작화와 두 '가이메르프'의 느리지만 화려하고 묵직한 전투신은 숨을 죽이고 몰입하여 볼 만큼 매력적이었다고 생각한다.